기무라 헤이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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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무라 헤이타로는 일본 제국 육군의 군인으로, 1888년 사이타마현에서 태어나 히로시마현에서 성장했다. 육군사관학교와 육군대학교를 졸업하고 포병으로 임관하여 시베리아 출병에 참여했으며, 독일 주재 무관으로도 활동했다. 1930년대에는 육군성에서 경제 동원국 통제과장, 병기국 국장을 역임하며 소장으로 진급했고,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의 작전을 계획했다. 1944년 버마 방면군 사령관으로 부임하여 미얀마 방어를 지휘했으나, 연합군의 공세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랭군을 탈출하여 무책임한 지휘로 비판받았다. 전후 A급 전범으로 기소되어 극동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1948년 교수형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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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무라 헤이타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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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기무라 헤이타로 |
본명 | 기무라 효타로 |
로마자 표기 | Kimura Heitarō (Kimura Hyōtarō) |
출생 | 1888년 9월 28일 |
사망 | 1948년 12월 23일 |
출생지 | 일본 사이타마현 |
사망 장소 | 일본 도쿄 스가모 형무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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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명 | 버마의 도살자 |
군 경력 | |
복무 기간 | 1908년 - 1945년 |
소속 | 일본 제국 육군 |
최종 계급 | 육군 대장 |
주요 지휘 | 제32사단 버마 방면군 |
주요 참전 | 시베리아 출병 중일 전쟁 제2차 세계 대전 |
재판 및 형벌 | |
죄목 | 평화에 대한 죄 전쟁 범죄 인도에 반한 죄 |
재판 | 극동 국제 군사 재판 |
형벌 | 사형 (교수형) |
사후 | 야스쿠니 신사 합사 |
기타 정보 | |
묘소 | 아오야마 묘지 (다테야마 묘지) 순국 7사 묘 야스쿠니 신사 |
2. 생애 및 경력
기무라 헤이타로는 1888년 사이타마현에서 태어났지만, 히로시마현에서 성장했다.[1] 1908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1] 1916년 육군대학교를 졸업한 후[1] 포병으로 임관했다. 시베리아 출병 기간(1918~1919년) 동안 백군을 지원하여 볼셰비키 적군에 대항했으며,[1] 이후 독일 주재 무관으로 파견되었다.[1]
1920년대 후반부터 기무라는 포병 감찰부와 야전 포병 학교의 교관으로 활동했다.[2] 1929년부터 1931년까지 열린 런던 군축 회의에 일본 대표단의 일원으로 선발되었다.[2] 귀국 후, 그는 중좌로 진급했으며 IJA 제22 포병 연대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2] 1932년부터 1934년까지 야전 포병 학교에서, 이후 해안 포병 학교에서 교관으로 복무했다.[2]
1935년, 기무라는 육군성 경제 동원국의 통제과장으로 임명되었고,[3] 이듬해에는 병기국의 국장으로 임명되었다.[3] 1936년에 소장으로 진급했고,[3] 1939년 중장이 되었다.[3] 1939년부터 1940년까지 중국에서 IJA 제32사단과 함께 전투 지휘를 맡았다.[3] 1940년부터 1941년까지 만주국의 관동군에서 참모장으로 복무했다.[3]
1941년, 기무라는 육군성 차관으로 복귀하여 육군대신 도조 히데키를 보좌하며 제2차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의 작전을 계획했다.[3] 1943년부터 1944년까지 그는 대본영의 일원이었다.[3]
1944년 말, 기무라는 버마 방면군 사령관으로 부임하여[4] 연합군에 맞서 미얀마 방어를 지휘했다.[4] 당시 일본군은 모든 전선에서 심각한 압박을 받고 있었고, 연합군은 제공권을 완전히 장악한 상태였다.[4] 증원과 탄약 부족에도 불구하고, 대본영은 기무라가 부대를 군수적으로 자급자족할 수 있을 것이라는 비현실적인 기대를 품고 있었다.[4]
1945년 영국군이 버마로 진공하자, 버마 방위는 수세에 몰렸다.[8] 기무라는 영국군의 침입에 공포에 질려 제대로 된 작전 지휘를 내리지 못했다.[8] 사쿠라이 쇼조 중장은 기무라에게 랭군을 떠나지 말고 최전선에서 지휘할 것을 진언했지만, 기무라는 이를 각하했다.[8] 다나카 신이치 방면군 참모장도 랭군에 남아 방면군을 통솔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기무라는 다나카 참모장이 출장 간 사이에 사령부 철수를 결정했다.
1945년 4월 23일, 기무라는 막료들과 함께 비행기로 랭군을 탈출하여 태국 국경 지대인 몰메인으로 철수했다.[8] 이는 남방군에 대한 무단 수도 포기였다.[8] 전선에서 고생하던 예하 부대, 일본이 지원하던 버마국 정부의 바 모 수상, 자유 인도 임시 정부의 찬드라 보스 주석, 일본 거류민 등은 버려졌고, 육로로 탈출하던 중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8] 기무라는 도피 직후 육군 대장으로 승진했다.
기무라의 랭군 포기로 인해 방면군의 지휘 계통은 큰 혼란에 빠졌다. 에야와디 강 서부에서 영국군과 교전 중이던 제28군은 적진에 고립되어 탈출 과정에서 절반 이상이 사망했다. 버마에서의 일본군 전사자 약 14만 4천 명 중 대부분은 기무라가 도망친 직후에 급증했다.
기무라의 이러한 행태는 버마 전역 생존자들로부터 군 지휘관으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격렬한 비판을 받았다. 아이다 유지는 자신의 저서에서 기무라가 일반 시민을 징발하여 수비하게 하고 자신은 비행기로 탈출했으며, 전선의 병사들에게는 '훌륭하게 죽으라'고 훈시했다는 점을 비판했다.[9] 메이티라-만달레이 전투에서 패배한 후 지연 작전을 펼쳤으며,[4] 양곤을 끝까지 방어하기보다는 부대 보존을 선택했다.[4] 1945년 대장으로 진급했다.
전후, 기무라는 A급 전범으로 기소되어 극동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6] 제3차 고노에 내각과 도조 내각에서 육군차관을 지낸 것이 크게 작용했는데, 당시 일본의 육군장관은 총리대신이 겸했기에 실질적인 군사책임자로 지목된 것이다. 그러나 버마 방면군 사령관으로서의 행동은 기소되지 않았다.[11]
재판 당시 버마에서 민간인을 학살했다는 증언이 나왔고, 이에 기무라는 오히려 훈장을 받아야 한다고 망언하여 변호사들마저 변호를 포기했다. 검찰은 기무라를 "버마의 도살자"라고 비난하며 격렬하게 비난했다.[11] 11명의 판사 중 인도인 판사를 제외한 10명이 유죄를 인정했고, 미국, 영국, 중화민국, 필리핀, 뉴질랜드, 캐나다, 네덜란드의 7명 판사들이 사형에 찬성했다.[12][13]
기무라는 도조 히데키의 권력 장악 시기에 무토 아키라와 함께 육군 중추의 권력을 쥐고 있었으며, 연합국 측은 일본 육군 차관직에 대해 서구와 비슷한 정치적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하여 그 권한을 과대평가했다는 시각도 있다.[11] 특히 검찰 측은 "침목 한 개, 사망자 한 명"이라고 불릴 정도로 많은 사망자를 낸 태국-미얀마 철도 건설 시의 책임을 물었다.[11]
일본 측에서는 기무라가 도조의 제물처럼 기소되었다고 보았고, 사형 가능성은 적다는 예상이 지배적이었으나,[13] 기무라는 스스로 사형 판결을 예상했던 듯하다. 그는 도쿄 재판에서 자신의 변론을 일절 하지 않았다.
1948년 12월 23일, 기무라는 스가모 형무소에서 교수형을 받았다.[14] 향년 61세였다. 그의 묘소는 아오야마 영원 내의 다테야마 묘지에 있다.[15] 1960년에는 순국 칠사 묘에, 1978년에는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었다.
2. 1. 초기 생애
기무라 헤이타로는 1888년 사이타마현에서 태어났지만, 히로시마현에서 성장했다.[1] 1908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1] 1916년에는 육군대학교를 졸업했다.[1] 졸업 후 포병으로 임관했다.[1] 이후 일본의 시베리아 출병 기간(1918~1919년) 동안 백군을 지원하여 볼셰비키 적군에 대항했다.[1]1920년대 후반, 기무라는 포병 감찰부와 야전 포병 학교의 교관으로 활동했다.[2] 1929년부터 1931년까지 열린 런던 군축 회의에 일본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석했다.[2] 귀국 후, 그는 중좌로 진급했으며 IJA 제22 포병 연대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2] 1932년부터 1934년까지 야전 포병 학교에서, 이후 해안 포병 학교에서 교관으로 복무했다.[2]
1917년부터 참모본부에서 근무했으며,[1] 1922년에는 독일 주재 무관으로 파견되기도 했다.[1] 1923년 귀국 후 소좌로 승진했다.[1] 1925년까지 육군대학에서 교관직을 맡다가 1926년에 포병 제24대대장으로 임명받아 현직부대로 돌아왔다.[1] 1928년 중좌 계급이었던 기무라는 포병감 부원으로 일했다.[1] 1931년 대좌로 승진해 야포병 제22연대장을 역임했다.[1]
2. 2. 군 경력 초기
기무라 헤이타로는 1888년 사이타마현에서 태어났지만, 히로시마현에서 성장했다.[1] 1908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1] 1916년 육군대학교를 졸업한 후[1] 포병으로 임관했다. 시베리아 출병 기간(1918~1919년) 동안 백군을 지원하여 볼셰비키 적군에 대항했으며,[1] 이후 독일 주재 무관으로 파견되었다.[1]1920년대 후반부터 기무라는 포병 감찰부와 야전 포병 학교의 교관으로 활동했다.[2] 1929년부터 1931년까지 열린 런던 군축 회의에 일본 대표단의 일원으로 선발되었다.[2] 귀국 후, 그는 중좌로 진급했으며 IJA 제22 포병 연대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2] 1932년부터 1934년까지 야전 포병 학교에서, 이후 해안 포병 학교에서 교관으로 복무했다.[2]
1935년, 기무라는 육군성 경제 동원국의 통제과장으로 임명되었고,[3] 이듬해에는 병기국의 국장으로 임명되었다.[3] 1936년에 소장으로 진급했고,[3] 1939년 중장이 되었다.[3] 1939년부터 1940년까지 중국에서 IJA 제32사단과 함께 전투 지휘를 맡았다.[3] 1940년부터 1941년까지 만주국의 관동군에서 참모장으로 복무했다.[3]
1941년, 기무라는 육군성 차관으로 복귀하여 육군대신 도조 히데키를 보좌하며 제2차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의 작전을 계획했다.[3] 1943년부터 1944년까지 그는 대본영의 일원이었다.[3]
2. 3. 육군성 요직
기무라 헤이타로는 1908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1] 소위로 임관하여 야전포병 제16연대에 배속되었다. 1916년 육군대학교를 졸업한 후[1] 참모본부에서 근무했으며, 1922년에는 독일 주재 무관으로 파견되기도 했다.[1] 귀국 후에는 육군대학교 교관, 포병 제24대대장, 포병감부원 등을 역임했다. 1929년에는 런던 군축 회의에 일본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석했다.[1][2]1931년 대좌로 승진하여 야포병 제22연대장을 역임했고, 1935년에는 육군성 경제 동원국의 통제과장으로 임명되어 일본 정책 결정 과정에 참여하기 시작했다.[2] 1936년 소장으로 진급하면서 육군성 병기국장에 올랐으며, 1939년 중장으로 진급하여 제32사단장을 맡아 산둥반도에서 전투를 지휘했다. 1940년부터 1941년까지는 만주국 관동군의 참모장으로 복무했다.[1]
1941년, 기무라는 육군성 차관으로 복귀하여 육군대신 도조 히데키를 보좌하며[3] 제2차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 작전 계획에 관여했다. 1943년부터 1944년까지 대본영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전략과 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했다.[3]
1944년 버마 방면군 사령관으로 부임하여 연합군에 맞서 미얀마 방어를 지휘했다.[4] 메이티라-만달레이 전투에서 패배한 후 지연 작전을 펼쳤으며,[4] 양곤을 끝까지 방어하기보다는 부대 보존을 선택했다.[4] 1945년 대장으로 진급했다.
2. 4. 버마 방면군 사령관
기무라 헤이타로는 1944년 말 버마 방면군 사령관으로 부임하여 제2차 세계 대전 연합군에 맞서 버마를 방어하는 임무를 맡았다.[4] 그러나 당시 일본군은 모든 전선에서 심각한 압박을 받고 있었고, 연합군은 제공권을 완전히 장악한 상태였다.[4] 증원과 탄약 부족에도 불구하고, 대본영은 기무라가 부대를 군수적으로 자급자족할 수 있을 것이라는 비현실적인 기대를 품고 있었다.[4]1945년 영국군이 버마로 진공하자, 버마 방위는 수세에 몰렸다.[8] 기무라는 영국군의 침입에 공포에 질려 제대로 된 작전 지휘를 내리지 못했다.[8] 1945년 4월 13일, 랭군 북서부 방위선을 지휘하던 사쿠라이 쇼조 중장은 기무라에게 랭군을 떠나지 말고 최전선에서 지휘할 것을 진언했지만, 기무라는 이를 각하했다.[8] 다나카 신이치 방면군 참모장도 랭군에 남아 방면군을 통솔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기무라는 다나카 참모장이 출장 간 사이에 사령부 철수를 결정했다.
1945년 4월 23일, 기무라는 막료들과 함께 비행기로 랭군을 탈출하여 태국 국경 지대인 몰메인으로 철수했다.[8] 이는 남방군에 대한 무단 수도 포기였다.[8] 전선에서 고생하던 예하 부대, 일본이 지원하던 버마국 정부의 바 모 수상, 자유 인도 임시 정부의 찬드라 보스 주석, 일본 거류민 등은 버려졌고, 육로로 탈출하던 중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8] 기무라는 도피 직후 육군 대장으로 승진했다.
기무라의 랭군 포기로 인해 방면군의 지휘 계통은 큰 혼란에 빠졌다. 에야와디 강 서부에서 영국군과 교전 중이던 제28군은 적진에 고립되어 탈출 과정에서 절반 이상이 사망했다. 버마에서의 일본군 전사자 약 14만 4천 명 중 대부분은 기무라가 도망친 직후에 급증했다.
기무라의 이러한 행태는 버마 전역 생존자들로부터 군 지휘관으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격렬한 비판을 받았다. 아이다 유지는 자신의 저서에서 기무라가 일반 시민을 징발하여 수비하게 하고 자신은 비행기로 탈출했으며, 전선의 병사들에게는 '훌륭하게 죽으라'고 훈시했다는 점을 비판했다.[9]
2. 5. 전범 재판과 처형
기무라 헤이타로는 전후 A급 전범으로 기소되어 극동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6] 제3차 고노에 내각과 도조 내각에서 육군차관을 지낸 것이 크게 작용했는데, 당시 일본의 육군장관은 총리대신이 겸했기에 실질적인 군사책임자로 지목된 것이다. 그러나 버마 방면군 사령관으로서의 행동은 기소되지 않았다.[11]재판 당시 버마에서 민간인을 학살했다는 증언이 나왔고, 이에 기무라는 오히려 훈장을 받아야 한다고 망언하여 변호사들마저 변호를 포기했다. 검찰은 기무라를 "버마의 도살자"라고 비난하며 격렬하게 비난했다.[11] 11명의 판사 중 인도인 판사를 제외한 10명이 유죄를 인정했고, 미국, 영국, 중화민국, 필리핀, 뉴질랜드, 캐나다, 네덜란드의 7명 판사들이 사형에 찬성했다.[12][13]
기무라는 도조 히데키의 권력 장악 시기에 무토 아키라와 함께 육군 중추의 권력을 쥐고 있었으며, 연합국 측은 일본 육군 차관직에 대해 서구와 비슷한 정치적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하여 그 권한을 과대평가했다는 시각도 있다.[11] 특히 검찰 측은 "침목 한 개, 사망자 한 명"이라고 불릴 정도로 많은 사망자를 낸 태국-미얀마 철도 건설 시의 책임을 물었다.[11]
일본 측에서는 기무라가 도조의 제물처럼 기소되었다고 보았고, 사형 가능성은 적다는 예상이 지배적이었으나,[13] 기무라는 스스로 사형 판결을 예상했던 듯하다. 그는 도쿄 재판에서 자신의 변론을 일절 하지 않았다.
1948년 12월 23일, 기무라는 스가모 형무소에서 교수형을 받았다.[14] 향년 61세였다. 그의 묘소는 아오야마 영원 내의 다테야마 묘지에 있다.[15] 1960년에는 순국 칠사 묘에, 1978년에는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었다.
3. 논란 및 비판
3. 1. 전쟁 범죄 및 잔혹 행위
전후, A급 전범으로 체포되어,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사형 판결을 받았다.[11]
제3차 고노에 내각·도조 내각에서 도조 육군 대신 밑에서 차관을 맡고 있었던 점(도조 히데키의 권력 장악 시에 기무라와 군무국장 무토 아키라가 육군 중추의 권력을 쥐고 있었다)과, 연합국 측에서 일본 육군 차관직에 대해 서구와 비슷한 정치적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여 실제 이상으로 그 권한을 과대 평가했다는 점이 전쟁 책임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이유이다.[11]
기무라는 전쟁 개시·수행 그 자체에 대한 책임인 이른바 전쟁 책임 외에도, 소인 54의 전쟁 법규 행위의 명령·수여·허가, 소인 55의 전쟁 법규 위반 행위의 방지 책임 무시와 같은 일반적인 전쟁 범죄에도 기소되었다[11]。검찰 측은 개인 논고에서, "침목 한 개, 사망자 한 명"이라고 불릴 정도로 많은 사망자를 낸 태국-미얀마 철도 건설 시의 책임을 물어, 기무라를 "버마의 도살자"라고 불렀다. 이 철도 건설에 관해서는 다수의 사망자와 학대 피해자가 발생했음을 버마 방면군 사령관인 기무라가 가까이에 있으면서 몰랐을 리 없다고 판결문에 적혀 있으며, 이 태국-미얀마 철도 문제가 많은 재판관의 사형 판단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기무라에 대한 11명의 판사의 투표는, 피고 전원의 무죄를 주장한 인도의 팔 판사를 제외한 10명이 유죄로 판단하여, 기무라의 판결은 태국-미얀마 철도 건설 문제를 포함한 버마 방면군 관할 하의 포로·일반인의 학대에 관하여, 소인 54, 55 모두 유죄로 판결되었다.[12][13] 미국(크레이머)・영국(패트릭)・중화민국(메이루아오)・필리핀(하라니야)・뉴질랜드(노스 크로프트)・캐나다(맥두걸)・네덜란드(레이링크)의 7명의 판사가 사형 찬성으로, 도조·도이하라·마쓰이·무토·이타가키와 함께, 가장 사형 찬성 투표가 많았다.
일본 측에서는 기무라가 단순히 도조의 제물처럼 기소되었다고 보고, 사형이 될 가능성은 적다는 예상이 지배적이었으며[13], 신문 기자나 변호인, 다른 피고의 가족에 이르기까지, 기무라 대장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견해를 다나카 노부오 중장의 조카에게 전했다. 그러나 기무라 자신은 사형 판결을 예상하고 있었던 듯하며, 판결 전날 면회 시에 두 아이를 데려오지 않고, "이 재판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처음부터 결론이 나 있는 재판이다. 그렇게 쉽지 않다"라고 말했다. 기무라는 도쿄 재판에서 스스로의 변론을 일절 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판 기록에는 기무라의 발언은 아무것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 후, 다나카 노부오 중장의 조카는 전범 유족회 "백국 유족회"의 회장으로 취임하여, 전범의 명예 회복에 힘썼다.
1948년 12월 23일, 판결에 따라 교수형에 처해졌다. 향년 61세. 묘소는 아오야마 영원 내의 다테야마 묘지[15]。1960년에 순국 칠사 묘、1978년에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었다.
3. 2. 무책임한 지휘
1945년(쇼와 20년), 영국군의 버마 진공이 시작되면서 버마 방어는 위기에 처했다. 기무라는 영국군의 버마 침공을 알았을 때, 공포에 손이 떨리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동요하여 작전 지도가 거의 불가능한 상태에 빠졌다.[8]4월 13일, 양곤 북서부의 방어전을 지휘하고 있던 제28군 사령관 사쿠라이 쇼조 중장은 기무라에게 "전황의 추이가 신속하여 언제 양곤이 전장이 될지 모른다. 양곤이 공격받은 후 방면군 사령관이 이동하는 것은 도망치는 것이 되어 작전 지도상 어려움이 발생한다"라며 "방면군 사령부를 즉시 샨 고원으로 전진시키고, 최전선에서 작전을 지도해야 한다"라고 진언했지만, 기무라는 이를 거부했다. 다나카 신이치 방면군 참모장도 "방면군 사령부는 과감하게 양곤에 머물러, 지금 각 방면에서 파탄에 직면하고 있는 방면군 통솔의 현실적이고 정신적인 중심으로서의 존재를, 방면군 스스로 양곤을 확보함으로써 명백히 해야 한다"라고 주장했지만, 사령부의 철수가 다나카 참모장의 출장 중에 결정되었다.
4월 23일, 기무라는 막료들과 함께 비행기로 양곤을 탈출하여, 태국과의 국경 근처인 몰메인으로 철수했다. 남방군에게는 무단으로 수도를 포기한 것이었다. 전선에서 고전하는 예하 부대나, 일본이 지원한 버마국 정부의 바 모 수상, 자유 인도 임시 정부의 찬드라 보스 주석, 하치야 테루오 자유 인도 임시 정부 초대 공사, 이시이 이타로 주 버마 대사 이하 일본 대사관원 및 민간 체류 일본인, 부상병 등은 버려졌다. 이들은 육로로 탈출을 시도했지만, 많은 희생자를 냈다. 이때 찬드라 보스는 인도 국민군 부대의 후미를 걸으며, 도하를 할 때 등은 마지막 병사가 도하를 마칠 때까지 강가를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기무라는 이 도피 후에 육군 대장으로 승진했다.
기무라를 포함한 버마 방면군 사령부의 갑작스러운 양곤 포기로 인해, 방면군의 지휘 명령 체계는 대혼란에 빠졌다. 이라와디 강 서부에서 영국군과 격전을 벌이던 제28군은 적 중에 고립되어 버렸고, 나중에 탈출하는 과정에서 절반 이상이 사망하는 큰 희생을 치르게 되었다. 버마 전역에서의 일본군 전사자는 약 14만 4천 명에 달하지만, 임팔 작전에서의 전사자는 1만 8천 명으로 12.5%이며, 전사자의 약 52%가 이 최종 단계에서 발생했다.
자신의 몸을 피하기 위해 필요한 지휘를 게을리하고, 일본과 동맹 관계에 있던 외국 요인 및 재류 일본인의 보호 의무도 다하지 않은 기무라의 군 사령관으로서의 책임에 대해서는, 버마 전역의 생환자를 중심으로 엄격한 비판이 가해지고 있다. 아이다 유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용|“양곤에 적이 다가오자, 일반 시민을 병역에 징발하여 수비하게 하고, 자신들은 비행기로 탈출했다. ... 시탄 강 진지에서, 우리는 머리를 흔들며 흘러오는 적십자 간호사의 시체를 매일 보았다.”
“우리 소대장은 학도 출신 병사로, 20년 초에 ... 버마에 왔을 때, 방면군 사령관 K 대장에게 면회되었다. 그 자리의 훈시는 이랬다. ‘새하얀 녀석이 왔군. 전선은 너희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달콤한 것이 아니다. 도움이 되기 위해서는 각오가 필요하다. 가라, 훌륭하게 죽어라’”|아이다 유지 『아론 수용소』[9]}}
한편, 하라 고는 "기무라를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고 밝히고 있다.[10]
3. 3. 전범 재판에서의 태도
기무라 헤이타로는 전후 A급 전범으로 체포되어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사형 판결을 받았다.[11] 제3차 고노에 내각 및 도조 내각에서 육군 차관을 역임하며 도조 히데키의 권력 장악에 기여한 점이 크게 작용했다. 연합국 측은 일본 육군 차관직에 대해 서구와 비슷한 정치적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 실제보다 권한을 과대평가했다는 시각도 있다.[11]
기무라는 전쟁 개시 및 수행 책임 외에도, 소인 54의 전쟁 법규 행위 명령·수여·허가, 소인 55의 전쟁 법규 위반 행위 방지 책임 무시와 같은 일반적인 전쟁 범죄에도 기소되었다.[11] 특히 검찰 측은 "침목 한 개, 사망자 한 명"이라고 불릴 정도로 많은 사망자를 낸 타이-미얀마 철도 건설 책임을 물어 기무라를 "버마의 도살자"라고 불렀다.[11] 판결문에는 기무라가 버마 방면군 사령관으로서 가까이 있었으면서도 철도 건설 과정에서 발생한 다수의 사망자와 학대 피해를 몰랐을 리 없다고 적시되어 있으며, 이 문제가 많은 재판관의 사형 판단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11]
기무라에 대한 11명의 판사 투표에서 라다 비노드 팔 판사를 제외한 10명이 유죄로 판단했으며, 기무라는 타이-미얀마 철도 건설 문제를 포함한 버마 방면군 관할 하의 포로·일반인 학대에 관하여 소인 54, 55 모두 유죄 판결을 받았다.[12][13] 미국(크레이머), 영국(패트릭), 중화민국(메이루아오), 필리핀(하라니야), 뉴질랜드(노스 크로프트), 캐나다(맥두걸), 네덜란드(레이링크)의 7명의 판사가 사형에 찬성했다.[13]
일본 측에서는 기무라가 도조 히데키의 제물처럼 기소되었다고 보아 사형 가능성이 적다고 예상했으나,[13] 기무라는 스스로 사형 판결을 예상했던 듯하며, 판결 전날 부인에게 "이 재판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처음부터 결론이 나 있는 재판이다. 그렇게 쉽지 않다"라고 말했다. 기무라는 재판에서 스스로 변론을 일절 하지 않아 공판 기록에 발언은 남아있지 않다.
1948년 12월 23일, 판결에 따라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향년 61세. 묘소는 아오야마 영원 내의 다테야마 묘지에 있다.[15] 1960년에는 순국 칠사 묘에, 1978년에는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었다.
4. 같이 보기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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陸軍次官に木村兵太郎中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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